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바라 왕국 (문단 편집) === 알브레 왕조 === 카탈리나 여왕 사후 아들 '''[[헨리케 2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그 외에도 베른, 푸아, 비고라, 리바고르자,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투르산, 가바르단, 타르타스, 리모주 일대를 상속받았다. 하지만 아직 14살밖에 안 됐기에, 큰누나 안이 몇 년간 섭정했다. 1521년, 성년이 된 헨리케는 부모대에 잃어버린 나바라 본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나바라인들은 1515년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에 병합하기로 한 이래 아라곤 관리들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각종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고, 자연히 강한 불만을 품었다. 과거에 아라곤 왕국 편을 들며 아라곤 왕국이 피레네 이남의 나바라 전역을 공략하는데 큰 도움을 줬던 보몽 가문 역시 정작 자신들에게 별다른 보답을 하지 않고 정치에서 소외시킨 것에 분노했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별 관련이 없는 자신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것에 분노한 주민들의 반란이 터졌고, 자연히 옛 나바라 왕국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 떨어졌다. 헨리케는 이런 상황에서 나바라 왕국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걸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1521년 봄, 레스파레 영주 앙드레 드 푸아가 지휘하는 군대가 헨리케의 명령을 받들어 원정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나바라인, 가스코뉴인,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 규모는 보병 12,000명, 기마 기사 800명, 대포 29문이었다. 이들은 셍-쟝-삐에-드-뽀흐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나바라 본토에 진입했다. 이후 대다수 나바라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조롭게 행군해 5월 19일 팜플로나에 입성했고 뒤이어 리자라, 타팔라 등 나바라 대부분을 장악했다. 앙드레는 여세를 몰아 카스티야로 진격해 로그로뇨를 포위했다. 그러나 카를 5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이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가 25,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뒤 나바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앙드레는 6월 11일 로그로뇨 공략을 포기하고 나바라로 철수했다. 6월 30일, 나바라의 부왕 나헤라 공작이 지휘하는 부대까지 합해 3만 이상으로 늘어난 스페인군은 팜플로나와 에스퀴로즈 사이의 넓은 평원에서 앙드레의 군대와 맞붙었다. 앙드레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임에도 과감하게 선제 공격을 가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이끄는 카스티야 기병대가 후방을 요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고, 결국 나바라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항복했다. 앙드레는 눈에 상처를 입은 채 체포되었다가 헨리케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났다. 헨리케는 이후에도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 영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1521년 9월 아말이우 성을 점령하고 1521년 10월 18일 온다리비아를 공략해 바즈탄 계곡을 장악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22년에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보낸 지원군과 함께 나바라 탈환에 착수했지만, 그 해 6월 30일 산 마르시알 전투에서 알부르케르케 공작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이끄는 스페인 민병대의 기습 공격에 완패했다. 1522년 7월, 레링고 백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아말이우 성을 탈환했다. 1523년 10월 9일, 카를 5세는 친히 팜플로나에 입성한 뒤 나바라 왕국이 스페인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그 해 가을,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리푸르댕, 하 나바르, 베른 일대를 파괴해 헨리케가 다시는 나바라 왕국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못하게 만들었다. 나바라인들은 이후에도 저항을 이어갔지만, 1524년 2월 푸엔테라비아 성에 포위된 저항군이 항복한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헨리케는 자기 힘으로는 카를 5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 왕국의 후원을 좀더 얻기로 했다. 그러려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신임을 얻어야 했기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참패를 막지 못하고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2년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본거지로 귀환한 헨리케는 1527년 앙굴렘 백작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후손인 샤를의 딸이며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이기도 한 마르그리트와 결혼해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려 했다. [[1528년]] 여름, 헨리케의 동생 카를로스와 아그라몽 가문의 가주 호아네스가 이끄는 나바라군이 나폴리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스페인군에게 궤멸되었고, 카를로스와 호아네스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후 1529년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간에 캉브레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더 받기 어렵게 되자, 그는 무력으로 나바라 왕국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단념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영토의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530년 카를 5세가 전략적인 이유로 셍-쟝-삐에-드-뽀흐, 생팔레, 바스티다에서 병력을 철수시키자, 그는 즉시 그곳에 군대를 이동시키고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베른 인근 포 지역에 본성을 세웠으며, 1538년에서 1546년 사이에 나바렌고세에 대포를 견딜 수 있는 성채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헨리케는 결혼 정책을 통해 상 나바라를 회복하기로 하고, 딸 [[호아나 3세|호아나]]를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펠리페]]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이 그렇게 했다가는 알브레 가의 영토가 스페인의 손에 넘어가서 자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이를 막았다. 결국 호아나는 펠리페 왕자가 아닌 부르봉 가문의 앙투안과 결혼했다. 1553년 12월 13일 포에서 헨리케의 손자 [[앙리 4세|헨리케]]가 태어났고, 나바라 왕국의 관습에 따라 즉시 비아나 공으로 지명되었다. 1555년 5월 25일, 헨리케는 하게마우 마을에서 사망했고 레스카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딸 호아나와 사위 앙투안이 각각 '''[[호아나 3세]]'''와 '''[[안토니오(나바라 왕국)|안토니오]]'''로서 나바라 공동 왕이 되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위그노들을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해 말 개혁적인 전직 [[수도자]]이자 설교자인 피에르 다비드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찾아갔다가 다비드가 앙리 2세의 위협을 받고 개혁 신앙을 포기하자 크게 실망해 그와의 교류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1558년 남편과 함께 개신교 예배에 참여한 그녀는 [[장 칼뱅]]의 편지에 고무되어 종교개혁을 완전히 수용했고, 1560년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칼뱅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종교 관용 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남녀 [[수도원]]을 몰수하고 [[사제]]와 [[수도자]]들을 나바라 왕국에서 추방했으며, 가톨릭 의식을 금지하고 칼뱅파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다. 또한 신약성경을 바스크어와 베아르네세 방언으로 번역하게 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맹]] 퇴치 정책을 실시했다. 반면 안토니오는 가톨릭 미사를 여전히 드리는 등 아내와는 달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입장을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 156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샤를 9세]]의 섭정을 맡고 안토니오를 프랑스군 중장으로 임명했다. 1562년 3월 가톨릭 교도들이 50명의 위그노를 살해한 바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달 말에 호아나와 안토니오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안토니오는 왕실의 압력에 따라 가톨릭을 수호하고 위그노를 배척하겠다고 맹세했지만, 호아나는 위그노 학살 사건에 항의하면서 미사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그녀를 아내로 여기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위그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갈등을 어떻게든 중재하고 싶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호아나에게 평화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간청했지만, 호아나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남편과 카트린의 분노가 두려워 1562년 3월 파리를 떠나 나바라 왕국으로 향하던 그녀는 도중에 방돔에 들러서 400명의 위그노 폭도들이 가톨릭 교회를 약탈하고 성상을 파괴하도록 허용했다. 안토니오는 이에 분노해 그녀를 체포하고 파리의 [[수녀원]]으로 보내려고 군대를 파견했지만 잡지 못했다. 호아나는 나바라 왕국에 도착한 뒤 위그노 군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왕실군의 침략에 대비해 나바라 전역을 요새화했다. 장 칼뱅 역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안토니오의 배신은 진리를 배신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올바른 신앙을 이룩하는 데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안토니오는 방돔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1562년 10월 나바라 왕국으로 진격했지만, 루앙 공방전 도중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아나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적진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직접 간호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지만, 안토니오는 이를 듣지 않고 정부 루이즈 드 라 베아루디에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 3세는 왕실군의 침략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했다. 전쟁은 1563년 3월까지 이어지다가 카트린과 호아나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일단 소강 상태가 되었었지만, 양자는 휴전 기간 중에도 서로를 꺾기 위해 병장기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 병력을 징발했다. [[교황]] [[비오 4세]]는 사절을 보내 가톨릭으로 돌아오고 이단을 폐지하도록 권고했지만, 호아나는 "베른에서는 교황 사절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답하며 거부했다. 비오 4세는 이에 분노해 호아나를 체포해 종교재판에 넘기고 나바라 왕국을 프랑스와 스페인에 분할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을 자기 영토로 여기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프랑스 섭정 카트린 모두 교황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교황청에 항의 서신을 보냈고, 비오 4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1568년, [[위그노 전쟁]]이 재발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동시에 압박하면서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호아나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위그노의 본거지인 라로셸로 피난했다. 이후 자신에게 동정적인 외국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그녀는 라로셸이 위치한 기옌 지방을 "프로테스탄트의 고향"으로 상징화하면서, 올바른 신앙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요새화 작업을 감독하고 군대 유지를 위한 재정 마련에 골몰하는 한편, 정보 수집 및 민간인 규율 유지를 담당했다. 여기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거액의 돈을 대출받으면서 자신의 보석을 담보로 사용했고, 라로셸에 피난한 수많은 난민들의 복지를 감독했다. 그녀는 종종 콜로니 장군과 함께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전장을 시찰했고, 방어 시설을 감독하고 위그노 군대를 사열했다. 여기에 라로셸에 칼뱅파 신학교를 세우고 학식이 뛰어난 위그노들을 교사로 세웠다. 1570년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간의 화해를 논하는 생제르맹앙레이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 체결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그녀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만나서 자신의 아들인 헨리케와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다. 왕위 후계자인 헨리케가 가톨릭 신자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4월 11일 헨리케와 함께 파리로 향했다. 이후 2달 간 다가오는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쇼핑하다가 결혼식이 열리기 2달 전인 1572년 6월 9일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브레 왕조가 단절되었고, 부르봉 가문이 나바라 왕국의 지배 가문으로 등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